책방, 무등산에서 살아남기

『사람사이』(수필집),『무등산』,『지리산』,『백두산』,『AI창세기』(몽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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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일기

🚌 나는 걷고, AI는 달린다 (1) – 책방 일상과 시대 감각의 경계에서

두렁 2025. 7. 13. 14:45

ai를 활용 직접 만들다

나는 걷는다.

 

아침저녁으로 집과 책방을 오간다. 편도 1.2킬로미터. 하루만 보 걷기를 스스로의 약속처럼 지킨다. 조금 서두르면 15분, 천천히 걷자면 20분 남짓 걸린다. 걷는 동안 사람들을 만나고, 골목을 스치며 하루를 정리한다. 생각이 떠오르고, 문장이 만들어지는 시간이다.

 

하지만 걷기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다. 먼 거리를 갈 때는 택시를 타고, 버스를 이용하고, 기차와 비행기를 탄다. 말 그대로 ‘이동 수단’을 탄다. 목적지에 더 빨리, 더 정확히 도달하기 위해서다.

 

AI를 대하는 내 태도도 이와 같다. 생각하고, 궁금해하고, 이해하고자 할 때는 걷는다. 하지만 신속하게 해결하거나 더 넓게, 더 깊게 접근해야 할 때는 AI라는 도구를 ‘탄다’. 요즘 나는 ChatGPT나 DeepSeek 같은 인공지능을 종종 이용한다. 검색보다 정확하고 빠르다. 질문을 하면서 스스로도 생각의 결을 정리하게 된다. 마치, 어디론가 떠나기 전 짐을 꾸리는 마음처럼.

 

그 AI를 통해 블로그 글을 쓰고, 블로그에 쓴 글들을 모아 책도 펴냈다. 『몽당소설 무등산』, 『몽당소설 지리산』, 『몽당소설 백두산』— 이 세 권은 모두 AI의 도움을 받아 단기간에 출간할 수 있었다.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면, 수개월이 아닌 수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AI는 나에게 있어 자동차이고, 고속열차이며, 하늘을 나는 비행기다. 하지만, 방향과 목적지를 결정하는 건 언제나 나다.

 

책방을 운영하면서 느끼는 점 중 하나는, 많은 이들이 기술을 손에 쥐고도 활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고급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면서도, 그것을 대중교통처럼 실생활에 자연스럽게 활용하지 않는다. AI도 마찬가지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기술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하지만 궁금해하지 않고, 묻지 않으면 그 기술은 그저 무거운 철덩어리에 불과하다.

 

나는 시시콜콜 AI에 묻는다. 날씨처럼 매일 변하는 상황에, 해묵은 의문에도, 또 때로는 철학적인 질문에도. 신통방통하다고 느낄 때도 있다. 질문이 바뀌면, 답도 바뀐다.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보다 더 발전한 내일의 AI를 경험한다.

 

그렇다고 종이책을 멀리하지는 않는다. 책은 여전히 내 삶의 중심에 있다. 단지 ‘종이책은 종이책대로’, ‘AI는 AI대로’ 활용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나는 도구에 예속되기보다, 목적에 따라 도구를 고르고, 그 도구의 성능을 신뢰한다.

 

책방을 처음 열었던 십 년 전을 떠올린다. 가장 곤란했던 일 중 하나는, 반품 공지나 출판사 알림이 ‘등기우편’으로 도착하던 일이었다. 시일이 촉박해 바로 다음 날까지 대응해야 하는데, 광산구 우편집중국에서 서류가 지연되는 일이 잦았다. 나는 수차례 우체국에 항의했다. 불만이 아닌 제안도 했다. 다음 카페나 네이버 카페를 이용해 공지를 올리면 어떻겠냐고.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전의 한 지역서점조합은 카페를 적극 활용해 쌍방향 소통을 잘했다. 나는 그 모습이 부러웠다. 같은 시대, 같은 일을 하면서도 어떤 조직은 말을 타고 한양 가듯 느릿하고 고단했고, 어떤 조직은 고속도로를 달리듯 앞서 나갔다. 21세기에 여전히 말 타고 출발하던 현실에 절망했다.

 

요즘엔 사람들이 “동네 책방이 책을 만들어 교보문고서 판매한다고요?”라며 의아한 눈길을 보내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게 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책방에서 책을 만들고, 주문을 받아 공급하고... 과거와 비교하면 얼마나 빠르고 유연한가.

 

학교장터는 또 다른 일터다. 나는 매일 아침, 수의계약 공고를 확인하고 견적서를 작성한다. 신학기 시즌인 2~3월엔 하루에 열 건 이상 공고가 올라온다. 그중 대부분은 각각 다른 엑셀 파일 포맷이다. 어떤 목록은 페이지 설정부터 글자 크기, 합계 필드, 필수 입력란까지 뒤죽박죽이다. 제대로 된 목록은 드물다. 엑셀 문서를 작성한 사람의 업무 능력이 그대로 드러난다.

 

나는 20여 년 전, 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을 기획하고, 신입직원에게 엑셀 교육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데이터 흐름도를 디자인, 업무분석 재설계를 웹에서 구현하기도 했다. 그런 기억이 있기에 지금의 어설픈 업무 처리를 보면 더 답답하다. 도구는 훨씬 좋아졌는데,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사고는 멈춘 것처럼 보인다.

 

왜일까? 질문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복잡하지?”, “더 나은 방법은 없을까?” 같은 물음을 생략한 채, 그대로 따라 하고, 시키는 대로 시늉만 하는 태도. 기술을 손에 쥐고도, AI를 손바닥에 올려놓고도, 묻지 않으니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의 정치를 보면 더 섬뜩하다. 질문 없는 복종이 나라를 어디로 데려갈지, 이제는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윤석열 대통령의 불법 계엄령 시도, 국회로 출동한 특전사 군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멈칫했다. 그들은 왜 출동했는가? 누가 명령했고, 무엇을 위해 움직였는가?

 

그들은 ‘왜’라고 묻지 않았다. 질문 없는 복종은 체제 유지에는 유리할지 몰라도, 인간의 존엄과 사회의 안전에는 독이 된다.

그런 장면을 볼 때면, 나는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계엄군의 특전사 총구를 맨손으로 잡고 흔들며, 국회를 지키려 했던 이름 모를 여성. 그녀는 질문하지 않는 이들을 대신해 행동했다. 누군가의 총구 앞에서, 누군가는 질문을 대신한 것이다. 그녀는 시대를 지킨 사람이다. 그리고 그 시대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나는 오늘도 걷는다. 그러나 AI는 달린다. AI의 속도에 나를 맞추진 않는다. 대신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분명히 한 채, 걷고 또 묻는다. 나에게 AI는 고속열차이고, 나는 그 차표를 고르고 탈 수 있는 사람이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다. 문제는 질문 없는 사회다. 질문 없는 정치, 질문 없는 교육, 질문 없는 일처리가 이 사회를 마비시킨다.

 

그래서 나는 계속 묻는다. 그리고 AI는 그에 응답한다.

 

나는 걷고, AI는 달린다.

 

그러나 목적지는 내가 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