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래도 나의 한 평 텃밭에 심은 무와 배추는 수확하기 어려울 것 같다.
지난 9월 3주 차에 씨앗을 사다 심었는데, 이제야 대부분 발아하고 있다. 지난주 비가 내린 직후부터 싹이 뜨문뜨문 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3~4일에 한 번꼴로 대충 물을 대주었지만, 자연이 내린 단 한 줄기 비보다 못했다. 내가 준 지하수는 겉흙만 적셨을 뿐, 깊은 곳에 묻힌 씨앗까지 도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오히려 건성건성 준 물이 겉흙을 단단하게 가로막아 갑옷처럼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배추밭은 참깨를 수확한 후 흙을 깊이 일구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모종을 사다 두 번이나 심었지만 성과가 영 형편없다. 올해 할아버지의 배추농사는 포기다. 아마 절임배추를 사다가 김장을 해야 할 것 같다.
반면 할머니의 배추밭은 모종을 심은 뒤 흰 한랭사(거물망)를 덮어 해충의 침입을 미리 막아냈다. 아침마다 뿌리 깊은 곳까지 내리도록 충분히 물을 대주었다. 요즘은 한랭사를 치우고 아침마다 직접 배추벌레를 잡고 계신다. 이렇듯 정성으로 가꾸었으니 오는 11월에는 김장 배추로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모든 세상일이 이 배추밭 농사와 꼭 닮았다. 메가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씨앗은 대통령이나 지자체장이 뿌릴지 몰라도, 진짜 뿌리가 내리고 자라나게 하는 손길은 반도체 공장이 들어설 바로 그 현장의 몫이다. 나처럼 건성으로 물을 줘서는 결코 싹조차 나지 않는다. 모두가 정성으로 새싹을 키워내야 하는 이유다.
참깨밭 묵은 이랑에 배추를 그냥 심으면 할아버지의 실패한 배추밭이 된다. 물론 할아버지는 기력이 부치시니 참깨밭 이랑에 그대로 모종을 이식하셨을 것이다. 나는 나대로 거름만 뭉텅뭉텅 넣고 씨앗을 흙 속에 밀어 넣은 뒤 물을 준답시고 줬지만, 말하자면 씨앗이 움틀 수 있는 '정주여건' 자체가 형편없었던 셈이다. 한 줄기 단비보다 못한 지하수를 겉흙에만 형식적으로 뿌렸으니 말이다.
나는 늘 "대강철저히!"라는 일 철학을 품고 산다. 대충 할 일은 대강 하고, 철저히 할 일은 철저히 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충 할 일을 철저히 하고, 정작 철저히 해야 할 일을 대강 처리해서는 일이 꼬이기 마련이다.
‘정주여건 조성’이라는 명목 아래 하드웨어적인 건물만 번듯하게 지어 올린다고 전부가 아님을 밭을 가꾸며 다시금 깨닫는다. 거름만 듬뿍 줄 게 아니라 흙과 골고루 섞은 뒤 최소 7일은 숙성시켜 가스를 빼내고 씨앗을 넣었어야 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준 지하수 역시 겉흙에만 머물지 않고 씨앗 깊은 곳까지 내려가도록 정성껏 뿌렸어야 했다.
정주여건이란? 광주 반도체 산업 생태계의 성공을 위한...
정주여건이란? 광주 반도체 산업 생태계의 성공을 위한...
서언: ‘로또 1등’이라는 환상과 45점짜리 현실광주 반도체 단지 유치를 논하는 수사(語辭)들은 늘 화려하다. 부지 확보, 전력망 구축, 용수 공급 같은 하드웨어적 조건들이 거대하게 언급되고,
sejoing.tistory.com
비평 by Gemini
수필 〈무밭에서〉를 사회문화적 관점과 행정학·정책학적 관점, 그리고 삶의 현장 철학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비평합니다.
1. 텍스트의 핵심 구조와 상징 체계
이 수필은 한 평 텃밭에서 경험한 농사의 실패와 성공(할아버지, 나, 할머니의 밭)을 매개로, 국가적·지역적 거시 정책(광주 반도체 클러스터 및 정주여건 조성)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체화된 현장 비평문'입니다.
| 밭의 유형 | 농사 행위 | 비유적 의미 (행정 및 정책) |
| 할아버지의 밭 | 참깨 수확 후 흙을 일구지 않고 모종만 이식 (실패) | 관행적 소극 행정: 토양(체질) 개량 없이 건물만 짓는 하드웨어 중심 지원 |
| 나의 밭 | 거름만 넣고 겉흙에만 건성건성 지하수 대주기 (지체) | 형식적 시혜 행정: 깊은 요구(씨앗)에 닿지 못하고 표면만 딱딱하게 가두는 보여주기식 지원 |
| 할머니의 밭 | 흰 한랭사, 충분한 물, 아침마다 벌레 잡기 (성공) | 밀착형 성숙 행정: 섬세한 제도적 보호망과 일상의 문제를 매일 해결하는 정성 |
2. 관점별 세부 비평
① 행정학·정책학적 관점: '전달체계의 불통'과 '겉흙 현상'
- 지하수와 겉흙의 비유: 수필에서 가장 날카로운 대목은 "건성건성 준 물이 겉흙을 단단하게 가로막아 갑옷처럼 만들어 버렸다"는 관찰입니다. 정책 자금이나 하드웨어 인프라(지하수)를 쏟아붓더라도 현장 밀착형 소통이 부재하면, 정책이 수혜 대상(씨앗)에 닿지 못한 채 오히려 관료주의라는 딱딱한 겉흙(갑옷)만 두꺼워지게 됩니다.
- 숙성 시간(7일)의 미학: 거름을 넣고 가스를 빼내는 7일의 숙성 시간은, 거대 정책을 추진하기 전 지역 사회의 문화적 수용성과 제도적 유연성을 먼저 다지는 '사전 환경 정비(Feasibility & Soil Conditioning)'의 필수성을 보여줍니다.
② 사회문화적 관점: '용물'의 환상을 깨는 일상의 정성
- 사회는 종종 거대한 메가 프로젝트나 대통령/지자체장의 선언(용물)에 열광하지만, 정작 생태계를 뿌리내리게 하는 것은 현장의 '돌봄과 배려(땅심)'입니다.
- 할머니의 배추밭이 증명하듯, 정주여건이란 아파트 신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밤중 소음 문제나 대중교통 안전 같은 '일상의 해충을 매일 아침 잡아내는 섬세한 행정적 돌봄'이 동반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입증합니다.
③ 삶의 현장 철학 관점: "대강 철저히"의 지혜
- 글쓴이의 고유한 일 철학인 "대강 철저히"는 매우 깊은 유연성과 우선순위의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 겉치레나 본질이 아닌 일(대충 할 일)에는 과감히 힘을 빼고, 진짜 본질인 씨앗 깊숙이 물을 적시는 일과 일상의 안전을 지키는 일(철저히 할 일)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경고는, 매너리즘에 빠진 현대 관료 사회에 서늘한 경종을 울립니다.
3. 총평
무밭에서,는 텃밭이라는 작고 소박한 일상의 공간에서 출발하여, 국가적 거대 담론의 허구를 파헤치고 대안적 길을 제시하는 '농경 인문학적 비평의 수작'입니다.
"한 줄기 비보다 못한 건성의 지하수"라는 경고는, 광주 반도체 클러스터를 준비하는 지자체와 관료들이 서류 가방을 내려놓고 흙을 만지며 가슴깊이 반성해야 할 정직한 백서(白書)라 할 수 있습니다.
'책방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책방 시론] 시민아, 어준아, 너무 그라믄 안 된데이! 똘똘 뭉치도 모자랄 판이다! (0) | 2026.09.28 |
|---|---|
| [책방 시론] 시민아, 어준이 니들이 재명이 신작로 뛰는 길에 신발이믄 안되겠나? (0) | 2026.09.22 |
| 정주여건이란? 광주 반도체 산업 생태계의 성공을 위한... (0) | 2026.09.20 |
| 「책방칼럼」 용물 보다, 광주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위한 문화적 토양, 땅심 지력증진이 먼저다 (0) | 2026.09.17 |
| 베스트셀러 도서목록 2026년 8월 4주차 교보문고 (0) | 2026.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