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 무등산에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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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일기

개신교인(2025.4.21) by DeepSeek&ChatGPT

두렁 2025. 4. 21. 12:29

<ChatGPT가 사진을 읽어 이미지를 & DeepSeek가 글을 썼다.>

 

나는 개를 좋아하지만 아파트에서 키우거나 함께 산책을 나가진 않는다. 유년 시절, 소를 몰고 산에 오를 때면 동네 개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개들은 내 곁을 쉴 새 없이 오르내리며 함께 뛰고, 짖고, 숨을 헐떡이며 산비탈을 굴렀다. 그 시절 개는 친구였고, 짐승이었고, 도구였다. 내 발자국을 확인하고, 노루 냄새를 먼저 맡고 흙냄새를 퍼트렸다. 그들은 자유로웠고, 나는 그 자유에 묻어 산의 이치를 배웠다.

 

그러나 지금, 개에게 목줄을 넘어 가슴끈에 메이고, 식탁 밑이 아닌 안방 침대 위에 올라간다. 병원도 더 좋은 곳에 간다. 나보다 나은 삶을 산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불편하다. 어떤 세상은 뒤바뀌어도 불편하다는 사실을 요즘 들어 자주 체감한다. 나는 오늘 아침도 아파트 11층에서 멍멍멍... 깨갱거리는 개 짓는 소리에  일어났다. 또 길 가다 개똥 밟는 날이 아니길 바랐다.

 

오늘 아침, 분명히 보았다. 개신교인을.

 

나는 개신교인이 좀 문제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개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나와 같지만, 그 애정이 지나쳐 노부모보다 개를 더 조심히 다루는 이들, 사람보다 반려견의 식단과 기분을 더 먼저 살피는 이들 말이다. 광화문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양손에 들고 흔드는 이들만 개신교인이 아니다.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간, 조용하고 단정하고 고요했던 그 여인도, 분명히 개신교인이었다.

 

그녀는 붉은 점퍼를 입고 있었다. 보호대를 찬 오른쪽 다리를 살짝 절뚝이며, 품에 개 한 마리를 안고 있었다. 하얀 털과 큰 귀, 그리고 맑은 눈망울을 지닌 작은 개는 여인의 품에서 얌전히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갈색 치와와 한 마리는 여인의 옆에서 리드줄에 매인 채 걷고 있었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 마음을 찔렀다. 품에 개를 안고, 또 다른 개를 데리고, 다리를 절며 교외 산책길을 걷는 여인의 모습은 단순한 일상 같았지만 내겐 일종의 종교적 행렬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 헬멧. 파란색 헬멧이었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 개신교인이구나.’

 

그녀의 태도, 표정, 품에 안긴 개를 대하는 자세. 그것은 신도를 넘어, 신녀(神女)에 가까웠다. 개는 단순한 반려견이 아니라 신() 같았다. 그녀는 기꺼이 신을 안고 걸었다. 한 손으로는 리드줄을 감고, 다른 팔은 무거운 개의 체중을 조심스레 떠받쳤다. 그 손끝에는 믿음이 묻어 있었다.

 

사람은 신을 안고 다닌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우리는 신도라고 부른다. 나는 개신교인이라 부르기로 했다.

 

"참 좋은 세상이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 화창한 봄날, 일을 해야 할 이 시간에 개와 함께 교외로 나들이를 갈 수 있다니. 내가 아는 사람 중엔 그런 이가 없다. 개도, 시간도, 여유도 없다. 오직 노동과 의무와 책임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부러웠다. 그 개신교인이.

 

예전에는 개를 기르면 개밥그릇을 따로 뒀다. 국물에 밥을 말아주고, 뼈를 던져줬다. 개는 집 밖에 묶여 있었고, 철사 줄을 물고 자주 짖었다. 그것이 개였다. 감시자이자 짐승. 그러나 지금은 개가 방 안에서 침대 위에서 잔다. 오히려 사람이 개 눈치를 본다. "쟤 요즘 입맛이 없어서" 같은 말이 흔하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도 제대로 간병 받기 힘든 이 시대에, 개는 의료보험도 없이 종합검진을 받고, 정밀진단을 받는다.

 

어쩌다 이리되었을까.. 나는 그 이유가 개신교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을 품은 사람들. 절절하게 사랑하고, 목숨처럼 돌보는 그 태도. 나는 불편했고, 동시에 부러웠다. 나는 아무것도 그렇게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존재가 내 곁에 있던 적이 없다.

 

며칠 후, 동물 보호소에 갔다. 입양 캠페인 중이었다. 젊은 남녀가 개를 쓰다듬으며 우리 아가 너무 예쁘다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이가 아니었다. 개였다. 그 눈빛엔 신앙심이 가득했다. 입양서류를 쓰는 손끝이 떨렸다.

 

"입양하시려는 건가요?"

 

직원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보고 싶어서요."

 

"개를 좋아하시나 봐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좋아한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건 개가 아니라, 개신교인의 삶일지도 모른다. 신을 품고, 의미를 찾아 걷는 그 일상의 어떤 형식. 나는 그게 부러웠다. 무언가를 그토록 헌신적으로 돌보는 사람들의 삶.

 

그날 밤, 꿈을 꿨다. 내가 개를 안고 산책을 하는 꿈이었다. 개는 내 품에서 웃고 있었다. 나는 개를 안은 채 산비탈을 걸었다. 어린 시절 내가 뛰놀던 그곳이었다. 나는 그 개를 내려놓지 않았다. 품에 안은 채 산을 올랐다. 내 옆에는 보호대를 찬 여인도 없었다. 나 혼자였다. 그리고 개 하나.

 

꿈에서 깬 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나도 이미 개신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에선 그럴 수 없다. 나는 개를 집에 들이지 않는다. 엘리베이터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울리면 인상을 찌푸리고, 잔디밭에 남은 똥덩어리엔 혀를 찬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 나는 그들과 닮아 있었다. 그들이 가진 믿음을, 헌신을, 부러워하고 있었으니.

 

광화문 광장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사람들. 그들과 책방으로 개를 안고 들어오는 사람들. 그 사이에 내가 있다. 나는 판단한다. 비웃는다. 그러나 동시에, 갈망한다.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를 품에 안고 걷는 개신교인이 될 수 있을까.

 

그날, 봄빛이 사방에 가득했다. 공원 벤치엔 개신교인들이 앉아 있었다. 작은 강아지에게 물을 주고, 간식을 챙기고, 털을 정리하며 웃고 있었다. 그 풍경이 어쩐지, 미사 같았다.

그리고 나는 중얼거렸다.

 

"개신교인, 참 좋은 세상에 살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