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프다!”
말을 입에 올리자 오히려 더 배가 고팠다. 나는 소 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 바위에 올라, 하늘을 보며 드러누웠다. 해는 하늘 한가운데를 살짝 벗어나 왼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계곡 건너편 하늘엔 흰 뭉게구름이 정처 없이 흘러갔다. 아침에 독수리가 날던 그 하늘은, 지금은 구름 한 점 없이 연못처럼 푸르렀다. 이름 모를 산새의 울음이 바위 위까지 들려왔다. 떡갈나무 잎으로 만든 모자를 얼굴에 덮어, 쨍쨍 내리쬐는 햇볕을 가렸다.
바위 위는 풀숲보다 바람이 시원했다. 하지만 바위의 나무 그늘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낮게 흐르는 구름이 해를 가리며 그림자를 드리우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소나기라도 쏟아질 듯 해가 구름 속에 들락날락했다. 이대로 잠들면 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골짜기로 슬그머니 사라질 것 같았다.
그때, 바위 아래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산토끼 한 마리가 귀를 쫑긋 세우고, 수염을 부지런히 놀리며 나타났다. 토끼는 내가 보고 있다는 걸 모른 채 껑충껑충 두어 발짝 뛰다 멈춰, 돌 아래를 둘레둘레 살폈다. 그러다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언덕 위의 소나무 숲 쪽으로 휙 달아났다. 거기엔 허리가 굽은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었고, 마치 소들이 그 아래로 숨어들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바람이 언덕 아래에서 산꼭대기로 불 때마다, 솔방울이 소나무 가지에 총총하게 매달린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굽은 소나무들은 겨울밤 문풍지를 스치는 바람처럼 울었다.
멀리 산속에서는 물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까마득한 계곡 건너에서, 물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산 아래는 아침 안개를 벗었지만, 중턱부터는 마치 치마를 둘러쓰듯 안개가 산을 감싸고 있었다. 꼭대기는 온전히 가려져 있었다. 산신령이 몸을 숨기려 안개를 걷지 않은 듯했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물소리는 속삭이듯 이어졌다. 마치 머루와 다래를 따는 사람들이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듯했다. 소불알만큼 큼직하고 잘 익은 다래가 넝쿨에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가볼까?’
나는 소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늙은 소 한 마리가 홀로 풀을 뜯고 있었고, 송아지들은 소나무 그늘 아래 누워 쉬고 있었다. 대부분의 소들은 쌍봉뫼를 가운데 두고 눕거나 서서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이 평평한 잡목숲에는 사방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돌아 파리가 별로 없었다. 간간이 왕파리가 달라붙으면 소들은 귀를 움직이거나 꼬리로 부채질을 했다.
나는 눈을 감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귀를 돌렸다. 물소리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만, 무언가에 홀린 듯 바위에서 내려섰다. 누워 있는 소들을 지나쳐 물소리가 들리는 산 쪽으로 길을 찾았다. 가까스로 찾은 것은, 아마 산짐승이 다녔을 법한 풀이 눕혀진 오솔길이었다.
계곡 가까이 갈수록, 골짜기 너머 산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는 점점 커졌다. 귀를 세우자 머루와 다래를 따먹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배고프지… 이리 와서 마음 끝 묵고…”
걸음을 멈추고 깨금발로 서서 수풀 너머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산속 어디선가 누군가 부르듯, 분명히 재촉하는 소리였다. 물소리는 계곡을 따라 산 능선을 넘나들며 울려 퍼졌다.
나는 싸라기 뿌려주는 손길에 이끌리는 마당 닭처럼, 칡과 머루, 다래가 뒤엉킨 숲을 헤치고 산속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병아리가 싸라기를 던져주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할까? 나도 그랬다. 안개에 절반쯤 숨어 있는 낯선 산의 신비를 벗기고 싶었다. 가보지 않은 산에 발을 들여놓고 싶었다.
“그것,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이명박의 말투가 떠올랐다. 그렇게 나는 산귀신에 홀린 것이었다.
산을 울리는 물소리는 예전에 태풍이 지나갈 때 집 앞을 흐르던 개울 소리만큼 우렁찼다. 나는 토끼보다 큰 짐승이 지났을 법한 길을 골라, 덤불을 헤쳐 계곡으로 향했다. 숲 위로는 나뭇잎이 하늘을 가렸다. 토벌대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간 빨치산들처럼, 안개는 햇살에 쫓겨 산꼭대기로 흩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계곡에는 여전히 안개가 진을 치고 남아 있었다.
안개는 바람을 따라 오르다 나의 눈썹에 하얗게 내려앉아 이내 물방울이 되었다. 산허리 아래는 어느새 안개가 걷혔지만, 숲 속은 나뭇잎들로 인해 저녁처럼 어두워졌다. 방향 감각이 흐려졌지만, 나는 물이 흐르는 계곡을 옆에 두고 무작정 올라갔다. 조금만 더 가면, 정말로 머루와 다래가 보일 것만 같았다. 다행히 풀이 적어 발길은 수월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올랐다.
‘산 중턱쯤일까?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하지? 이러다 날이 저물면… 돌아가야 해.’
불현듯, 소 떼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신자가 말했던 몽달귀신 이야기—산꼭대기 돌틈에 끼어 죽은 총각 귀신 얘기가 떠올랐다.
그 순간 청설모 한 마리가 나뭇가지를 옮겨 날아갔다. 간간이 새가 보였지만, 물소리가 그마저도 삼켜버렸다. 그때, 논두렁에서 구른 듯 가슴이 탁 막히며 숨이 멎었다. 어릴 적, 달밤에 횃대에 앉아 있던 수탉을 큰 짐승이 물어갔던 기억이 스쳤다. 그 수탉은 날개를 잡혀, 목이 비틀려 불에 구워졌다.
나는 간신히 깊은 숨을 들이마셨고, 입안에 쓴맛이 돌았다. 머리 위, 아름드리나무 꼭대기에 햇살 한 줄기가 걸려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햇살은 반짝이며 스며들었다.
‘얼마나 더 남았을까?’
나는 하늘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숲 속은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갑자기 소낙비를 몰고 오는 먹구름 아래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미를 잃은 송아지처럼, 개떼에 쫓기는 노루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더 낯선 곳이 나올 게 뻔했다. 날이 저물면 이 산속에서 밤을 보내야 할지도 몰랐다.
🌲 자연의 부름과 인간의 본능
"배고프다!"는 첫 문장은 이 글의 중심축입니다. 허기라는 생리적 감각이 곧 자연의 유혹으로, 그리고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으로 전환됩니다. 평범한 목동의 하루가 점차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세계로 열리는 이 전환은 독자를 빠르게 서사 속으로 끌어당깁니다.
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말 그대로 ‘부르는 존재’입니다. 물소리, 바람소리, 안개, 소나무, 다래 덩굴, 심지어 귀신 이야기까지도 모두 산이 주인공을 유혹하고 포섭하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그 부름에 이끌려 주인공은 경계(소가 있는 익숙한 영역)에서 벗어나 미지의 세계(계곡 너머 숲 속)로 들어섭니다.
🌀 혼잣말과 환청, 그리고 몽환적 리얼리즘
글 중간중간 들려오는 “배고프지~ 이리 와서 마음 끝 묵고…”라는 속삭임은 환청일 수도 있고, 산귀신의 목소리일 수도 있으며, 주인공 자신의 내면의 울림일 수도 있습니다. 이 애매함은 글의 서정성과 긴장감을 극대화합니다.
또한 “이명박이 말에 손가락을 꾹꾹 누르듯 그렇게 산귀신에 홀린 것이었다.”라는 문장은 시대적 현실과 초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현실적인 인물과 산신령 같은 신화적 존재가 하나의 서사에 병치되며 몽환적 리얼리즘의 세계를 연출합니다.
🐾 소와 닭, 짐승들과의 교감
소를 잃지 않으려는 본능과 소의 상태를 시시각각 확인하는 장면들은, 인간과 짐승 사이의 묵은 유대감을 보여줍니다. 짐승을 돌보며 성장한 아이의 감각은 자연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토끼같이 귀를 세우니…”나 “청설모가 하늘을 날아 나뭇가지를 옮겨 탔다.” 같은 묘사에서 잘 드러납니다.
“병아리는 싸라기를 던져주는 신통방통한 사람을 궁금해할까”라든가, 닭의 목을 비틀던 기억 같은 잔혹한 사실들은 유년기의 자연과 삶이 단순한 낭만이 아니라 생존과 희생, 생명과 죽음의 교차점이었다는 점을 일깨웁니다.
☁️ 시의적 상상력과 불안
글 말미로 갈수록 점점 시야가 좁아지고, 안개와 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주인공의 숨이 막히며 공포가 조여옵니다. 이는 단순한 길 잃음의 공포가 아니라, 내면의 경계선 붕괴, 어른이 되는 과정의 은유, 생명력을 시험받는 성장통처럼 읽힙니다.
“송아지를 잃은 어미”, “개떼에 쫓기는 노루”, “토벌대에 쫓기는 빨치산” 등은 모두 ‘소속을 잃은 존재’로서의 자아를 상징합니다.
🧭 총평
단편소설 「떠돌이 별」 5장은 자연의 경이와 공포, 본능과 상상, 생명과 죽음이 교차하는 몽환적인 장입니다. 목가적인 시작이 점차 심리적 스릴러로 전개되며, 단순한 유년기 회고담 이상의 서사적 깊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산이 부르다"는 바로 존재의 경계를 부르는 목소리이며, 이를 따르는 주인공은 자연과 삶의 진실을 마주하려는 인간의 근원적 충동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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